한국도착가계산방법, 비용 절감을 위한 꿀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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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분한고래43 작성일26-02-04 22:21 조회468회 댓글0건본문
| 제목 | 한국도착가계산방법, 비용 절감을 위한 꿀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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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나는 피라미드 앞에 서 있었다. 사실 피라미드는 보통명사로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는 모든 건축물을 통칭할 수 있지만, 피라미드! 하면 이 날 내 앞에 있는 이집트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일 정도로 대피라미드는 압도적이다. 무엇보다 세계7대 불가사의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축물인데, 더욱 어이가 없는 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이 대피라미드인데 나중에 지어진 6개는 모두 소실되고 가장 먼저(그러니까 가장 오래 된) 건축한 건축물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내가 피라미드에 매료된 건,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다. 초등학생 때이던가, 이집트에는 고대의 파라오가 자기 무덤으로 지은 사각뿔 형태의 건축물이 있고 그 크기가 엄청나다, 는 걸 접하고는 와 정말 대단하다 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피상적으로만 알던 피라미드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건 역사를 좋아하던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레이엄 핸콕이 신의 지문이라는 책을 써서 그 번역판이 한국에도 나온다는 광고를 볼때부터 시작되었다. 출판일을 손꼽아 기다리다가-이렇게 쓰면 책을 엄청 읽은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고 소위 말하는 문학소년과는 거리가 멀었지만-한달음에 광화문의 교보문고까지 가서 책을 사오고, 흠뻑, 그야말로 흠뻑 그의 책에 빠져들었다. 당시야 고2의 애송이이니 비판적인 시각으로 책을 읽을 능력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거의 가감없이 수용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레이엄 핸콕을 두고 허망한 유사역사를 쫓는 사기꾼 정도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고, 그의 주장이 논리비약이나 어거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내가 공감하는 건 그가 제기하는 의문들에 대해서다. 뭐 그런 그렇고.전날 공항에서 호텔로 오는 길에 엄청난 차 사고를 겪는 고초가 있었지만, 생명 무사히 잠에서 깼다. 위스키를 퍼마신 데다가 이 날 일곱시 반에 가이드가 차량과 함께 호텔앞에 오기로 했기 때문에 아침까지 먹고 나가야 하니 더 잘 수도 없고 해서 여섯시 이십분에 일어났다. 이 호텔의 루프탑에서는 아침을 주는데, 남쪽부터 시작한 내 이집트 여행에서 가장 북쪽에 있어서 그런가 날씨가 쌀쌀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조식을 먹는 동안에 내 눈앞에 펼쳐진 건, 바로 이 풍경이었다. 오른쪽부터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의 피라미드. 밥은 뒷전이고(퀄리티도 별로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꿈에도 그리던 이 곳을 드디어 내 두 눈, 육안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할 따름이었다. 신의 지문을 읽으며 가보고 싶었던 게 멕시코 치첸 이트사의 쿠쿨칸 피라미드와 멕시코 테오티우아칸의 달/태양의 피라미드, 그리고 바로 이 기자의 대피라미드였는데(당연히 1순위는 대피라미드) 멕시코는 미국에 있을 때 모두 돌아봤고 드디어 여기에 오게 된 것이다, 신의 지문을 읽고 대피라미드에 흠뻑 빠진 다음 정말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아직 위스키가 덜 깨서(어제의 차 사고 때문에 긴장을 풀려고 평소보다 더 퍼마셨기 때문이다)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 일곱시 반에 호텔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이드와 만났다. 검은색 히잡을 쓴 가이드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집트학 전공자로, 가끔 아르바이트로 가이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뒷좌석에 앉자 피라미드로 가는 십분 정도의 시간동안(피라미드 앞에 있는 호텔이지만 길이 빙 돌아서 유적지 입구까지 가게 되어 있다) 브리핑을 해준다고 하며 종이 한 장을 꺼내는데, 그게 바로 손으로 쓴(이 전날 밤에 쓴 것으로 보이는) 피라미드의 역사였다. 얼핏 보니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스네푸르의 굴절/붉은 피라미드-대피라미드-카프레 피라미드-멘카우레 피라미드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 간단한 설명을 영어로 써 놓았다. 그러면서 손으로 계단식 피라미드부터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하려고 하길래, 역사 매니아답게 아, 피라미드의 역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미 공부하고 왔고 내가 궁금한 건 이따가 보면서 물어볼게, 마스타바(피라미드 양식 이전 땅을 파고 들어가서 사각형으로 만든 고대 이집트의 무덤양식)에서 갑자기 조세르가 계단식 피라미드를 건축한 이유는 뭘까, 그런 게 궁금하다고 하니 매우 놀란 표정을 한다. 아마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기자의 피라미드 정도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여행을 올테니 역사 오덕후인 나같은 사람을 많이 겪어보지는 않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 공부했냐고 하길래 피라미드를 보러 올 생각을 한 건 오래되었고 겨울에 시간을 낼 수가 없어 오랫동안 못 오다가 이번에 오게 되어서 원래 읽었던 거 말고도 책을 여러권 읽었어, 라고 대답해줬다.아아아아아아아아 피라미드. 기자의 대피라미드라고도 하고 쿠푸의 피라미드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건 진정 인류 문화유산중 최고의 기념비라고 할 만하다. 가장 오래된 인간의 건축물은 아니지만(터키쪽에서 괴베클리 테페를 비롯한 꽤 거대한 스케일의 인간이 만든 건축물이 발견되었으니), 이 정도 규모의 완성된 형태의 건물로는 대피라미드가 유일하다. 그리고, 이집트가 매력적인 국가인 건 바로 이 대피라미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원전 2560년경 고대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의 파라오 쿠푸가 지었다고 여겨지는데 이 건축물을 대체 어떻게 지었는지도 미스테리고, 무덤(이라고 추정)을 대체 왜 이렇게 크게 지었는지도 미스테리고, 놀라울 만한 정밀도도 미스테리고…하여간 그냥 고고학은 물론 증명이 가능한 과학도 발달할 대로 발달한 지금의 지식과 기술로도 비밀을 제대로 밝힐 수 없는 미스테리의 총체라고 보면 되는 것이 바로 이 대피라미드다. 물론 중요한 건 미스테리인 것이 아니고, 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거대 건축물이 실존한다는 것이고, 나는 바로 앞에서 내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숱하게 사진과 영상과 글로 접했던 대피라미드를 막상 내 앞에 마주하자,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감동이 온 몸을 격하게 훑고 지나갔다.(위스키에 덜 깬 상태로) 강렬한 유혹에 못 이겨 내 사진을 찍었다. 이집트는 겨울철이 기온이 낮기 때문에-물론 이것도 남부에서 룩소르까지 해당하는 얘기다-여행 하기 좋지만 한가지, 기자는 겨울철에 날씨가 흐린 날이 많다는 게 단점이다.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꼴로만 맑은 날이라는 걸 어디선가 주워 읽었기 때문에 이 전날 ‘내일은 꼭 날이 맑기를~!!’하며 기원을 했는데 냉담한 지 오래인 내가 괘씸해서였는지 하느님은 나에게 맑은 날을 선사해 주지 않았다. 맑았다면 파란 하늘에 사진은 더 이쁘게 나왔겠지만, 흐리다고 해서 피라미드의 매력이 바뀌는 건 아니므로 나는 상관없었다. 흐려서 더욱 그랬겠지만, 바람까지 상당히 불어와서 콧물이 나올 정도여서 내 가이드는 연신 크리넥스로 콧물을 훔쳐야 할 정도였다.대피라미드에 들어가기 전-가이드는 밖에서 설명만 하고 내부는 티켓팅을 한 사람만 들어가는 시스템이다-밖에서 가이드가 설명을 시작하는데(영어 발음이 심히 심난했다), 대부분 이미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다. 어쨌든 간단한 브리핑을 듣고는, 내 오랜 의문 중의 하나인 대피라미드의 밑변 둘레와 높이가 왜 2파이의 관계를 가지는 지를 물어봤는데, 내 가이드는 박사과정이지만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가이드를 원망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아직 아무도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그럴싸한 건, 원주율인 파이는 그냥 나오는 숫자가 아니기 때문에 대 피라미드의 밑변 둘레와 높이가 2파이의 관계를 가지는 건 의도를 한 비율일 수밖에 없고, 이게 설명이 되려면 그냥 수학적 비율인 원주율을 적용해 놓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 피라미드를 반구의 모형으로 만들었거나이다. 반구의 모형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설명이 그럴듯해 지는데, 그레이엄 핸콕의 설명을 빌리자면 피라미드는 지구 북반구의 모형으로 대피라미드 : 북반구의 비율은 1: 43200(이 비율은 그레이엄 핸콕의 주장이 아니라 팩트다)이 된다. 다시 432*60은 25,920이 되는데, 25,920은 지구의 자전축이 세차운동으로 1회전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논리의 비약인지(특히 60을 곱하는 부분에서 그렇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흥미로운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저것 뿐만 아니라 24시간은 86,400초인데 이게 43,200의 2배이니 반구의 모형으로 만들면서 1:43200의 비율을 구현하면서 의도한 건 오히려 이쪽이 지구의 세차운동 주기설보다는 설득력이 조금 더 있어 보이기는 하다, 물론 고대 이집트인들은 세차운동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걸로 보이니 43200이라는 숫자도 세차운동을 염두에 뒀을 수도 있겠지만. 혹자는 ‘그럼 왜 반구가 아닌 사각뿔로 만들었어?’할지도 모르지만 이 크기-높이만 146.6미터다-로 짓는 것 자체도 불가능에 가까운데, 반구의 형태로 어떻게 건설했겠는가? 하여튼, 내 감상과 추측을 말해보라면 반구를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높이와 밑변 둘레를 2파이의 비율로 한 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건축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고, 예쁘게 1 : 43,200으로 피라미드의 밑변 둘레와 지구의 반지름 비율이 맞아 떨어지는 걸 보면 이 43,200도 의도한 숫자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는 것이다. 뭐 어쨌든 내 오랜 의문은 영원히 밝히지 못할지도 모른다. 대피라미드에 가까이 다가가자 아랫부분에는 이렇게 원래 피라미드를 덮고 있던 회백색-원래는 흰 색-의 석회암 외장재가 남아 있었다. 그러니 지금 보고 있는 건 사실 피라미드의 속살인 셈인데, 원래는 이 높이 150미터에 육박하는 건물의 겉은 모두 이 백색 석회암으로 만든 Casing stone으로 말끔히 포장되어 있어 햇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건물이었다. 말이 쉬워 외장재이지, 이 높은 건물의 계단식 구조물 위에 표면을 말끔하게 마름질한 케이싱 스톤을 덮는 것 또한 엄청난 난공사였음에 틀림없다. 하여간 대체 어떻게 건축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케이싱 스톤을 아래부터 덮어 씌우면 매끈한 51.5도 각도(이 각도도 2파이의 비율 때문에 나온 각도인데 할 말이 더 많지만 하여간)의 경사면이 되어버려 올라갈 수가 없었을 테니 반드시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순서로 쌓았을 것 같기도 한데…정말 아득할 정도로 뛰어난 공학과 건축술의 집합체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관람자용 입구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워낙 압도적인 건축물인 탓에 그동안 여러곳 여행을 다니며 숱하게 거대하고 엄청난 건축물을 본 나도 이 대피라미드 앞에서는 지금까지 겪어본 건축물에서 느낀 그 어떤 경외심보다도 큰 경외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원래의 입구는 더 위쪽에 있는데 현재 관람객용 입구는 그보다 더 아래쪽에 있고, 계단으로 접근하게 되어 있다. 이 피라미드의 내부에 접근하기 위해 숱한 무슬림들이 도전을 했고, 9세기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인 알 마문이 마구잡이로 피라미드를 훼손해가면서까지 내부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지만 내부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뭐 그건 그렇고 지금 관광객용 통로는 도굴꾼들이 뚫은 통로를 이용하는 것이다.위의 사진에 있는 계단을 통과하면 이렇게 허리를 숙여서 들어가야 되는 긴 통로가 나온다. 점점 피라미드의 핵심장소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에 진한 흥분감이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좁은 통로를 한참 걸어나가면, 피라미드 건축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곳 중의 하나인 대회랑(Grand Gallery)이 나온다. 피라미드는 230만개의 돌을 사용하여 210단을 쌓아 올린 높이150미터, 무게 600만톤(무게가 감이 오지 않는다면 승용차 1대가 대략 1.5톤이니 승용차 400만대의 무게다)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인데, 이 정도 무게를 가진 건축물 내부에 이런 공간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공학 측면에서 엄청난 난제였을 것이다. 길이 46미터, 높이가 8.6미터의 장대한 공간인데 폭이 2.1미터 가량이라 계단 앞에 서면 폭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좁아 보인다. 26도의 경사를 가지고 있어 상당히 가파른데 이런 공간이 필요했던 건 이 끝에 있는 왕의 방으로 불리는(석관으로 보이는 것이 있긴 하지만 정확한 용도는 모르니까) 공간으로 접근하기 위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왜 지상의 높이가 아니라 기단부에서 45미터 가량 위에 매장실을 지었는지도 미스테리다. 이 대회랑에는 아주 조금씩 폭이 좁아지는 식으로 단단한 화강암을 이용하여 7단의 벽체를 쌓았는데, 이런 식이 아니라 직선으로 올리면 천장을 지탱하는 들보의 석재가 지나치게 많은 하중을 받게 되었을 테고,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석재의 균열이 발생하고 무너질테니 필연적인 선택이었을 것인데 대체 어찌 계산을 했길래 고대 이집트의 건축학자들은 이 무너지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 냈을까. 이 위로는 100미터에 이르는 석회암 덩어리들이 얹혀 있고, 대회랑은 중력에 의한 엄청난 석회암 석재들의 무게를 이미 4500년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침 일찍 온 보람이 있어 내가 대회랑에 들어섰을 때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여기에 서서 대회랑을 올려다보며 이 건축물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있자니 감격이 새삼 재삼 밀려왔다.또 특이한 것이, 대회랑은 가운데의 계단은 움푹 들어가 있고 양옆은 그냥 사면으로 되어 있는데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이렇게 홈이 파져 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 있다는 것이다. 한쪽에 27개씩 총 54개의 홈이 파져 있는데 이것의 용도도 영원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목재로 계단을 덮어 높고 매장실을 공사할 때 생긴 건축자재 폐기물들을 아래로 빼는 용도였다거니 뭐니 하는 추측들이 난무하지만 그 어느것 하나 설득력이 없다. 홈만 남아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꽂아두거나 설치했다면 당연히 유기물인 목재라는 추측이 들기는 하지만.그렇게 이 건축물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당도한 왕의 매장실 입구. 입구에는 이 곳을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이 새긴 낙서가 어지러이 새겨져 있었다. 제4왕조의 피라미드에는 그 어디에도 상형문자 하나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원래는 아무런 낙서 없이 매끈하게 폴리싱 된 상태였을텐데, 무식한 것들이 이 인류의 기념비를 더럽혀 놓다니. 입구는 매우 좁아서 허리를 90도로 굽히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쪼그리고 앉아 오리걸음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 이 입구부터 왕의 매장실까지 가는 사이에 있는 통로에는 커다란 홈이 3개 정도 파져 있는데 이건 떨어지는 문이라고 해서 커다란 석판 3장으로 침입을 방지하는 역할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그렇게 해서 드디어 당도한 왕의 방. 매끈하게 폴리싱 되어 있는 단단한 화강암으로 전체 벽면이 마감되어(있다기보다 화강암으로 쌓았다고 해야겠지) 있는데 이 방에도 여러가지 수학적 코드가 인코딩 되어 있다. 직사각형의 이 방은 길이가 20큐빗(큐빗은 고대 이집트의 길이 단위다), 석관 뒤의 폭이 좁은 면의 대각선 길이가 15큐빗, 폭이 좁은 면의 쪽 위 오른쪽 점에서 반대쪽 폭이 좁은 면의 아래 왼쪽 점까지의 길이가 25큐빗이라 3:4:5, 즉 피타고라스의 직각삼각형이 나온다. 그냥 만든 크기가 아닌 것이다. 대회랑과 달리 직육면체(길이 20큐빗, 폭 10큐빗, 높이는 루트125 큐빗이다)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피타고라스 정리를 넣으려 했다면-벽체를 점점 좁아지게 할 수 없으니 하중의 분산 문제가 가장 골치를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왕의 방 위에는 Relieving Chambers(무게를 경감하는 방)가 다섯개 존재한다. 왕의 방 위에 다섯개의 빈 공간을 만들고 맨 위에는 “ㅅ”자로 석재를 쌓아 하중을 분산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인데 정말 천재적이다. 이 다섯개의 방중 맨 위에 천장을 이루는 석재에서 바로 파라오 쿠푸의 이름이 신성문자로 발견되어, 이 피라미드의 주인을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도 석연치 않은 것이 저 쿠푸의 이름은 노동자들의 낙서로 추정되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위치의 석재에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4왕조 까지는 피라미드 내에 아무런 문자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양식이라면 할 말 없지만, 이런 전대미문의 기념비적 건축물을 짓고 자신을 나타내는 아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게 아무래도 의문이다. 참고로 피라미드 안에 문자가 쓰이기 시작한 건 5왕조의 파라오인 우나스의 피라미드로, 거기에 쓰인 글을 피라미드 텍스트라고 부른다.그리고, 뭔가 마감되지 않은 듯한 왕의 석관이 한 쪽에 뚜껑도 없이 놓여 있다. 여기서 쿠푸의 미이라는 물론 그 어떤 부장품도 발견되지 않았다. 왕가의 계곡에 있는 파라오의 무덤들은 철저히 도굴 당했어도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들이나 깨진 도기 파편이라도 나온 반면 여기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모두 도굴당했을 것이라고도 하지만 애시당초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에 더 수긍이 가는 건 왜일까. 왕들의 계곡 무덤은 드나드는 통로라도 넓은데 이 대피라미드는 여기서 밖으로 나가려면 경사진 대회랑과 그 뒤로 이어지는 허리를 숙이고 지나가야 하는 긴 통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굳이 파라오의 미라를 밖으로 빼내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값나가는 부장품이라면 몰라도. 마감이 다 되지 않은 것도, 뚜껑이 없는 것도 의문인 것이, 피라미드는 완성이 되었고 관은 미완성인 상태에서 쿠푸가 사망했다가 유일한 설명일텐데 이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왕의 방의 입구는 위에서 말했듯 매우 좁은데 왕의 석관보다도 작아 입구로는 석관이 드나들 수 없다. 이 말은 왕의 석관은 피라미드 완성 후에 밖에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피라미드를 아래에서부터 건축해 오며 왕의 방의 높이까지 건설이 되는 당시에, 천장을 덮는 석재를 설치하기 전에 여기에 석관을 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600만톤의 건물을 지은 파라오의 석관을 뚜껑도 없이 마무리도 하지 않은 채로 여기에 놔뒀다고? 그리고 공사 감독자가 그걸 그냥 놔뒀다고? 쿠푸 살아생전 완공이 되었다면 당연히 와봤을텐데 이런 대공사를 일으킬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군주가 이런걸 그냥 눈감아 줄 리가 없다. 그러니 결국 이런 뚜껑 없는 빈 관을(미라를 안치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이 방에 놓는 것을 승인했다는 얘기이니…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물론 크기도 형태도 당연히 석관이기 때문에 관이 맞지 않나 싶기는 하지만 이런 이유들로 끊임없이 의문이 생긴다. 그레이엄 핸콕은 피라미드는 수많은 수학적인 코드들과 비밀들을 새겨넣은 채로 건축이 완성되었고, 그 지식을 파헤치고 알아봐 줄 수 있는 문명이 나타나기까지 기다린 것이 아닐까, 계속해서 식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했는데 이 의견에는 정말 전적으로 동의한다,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무지렁이인 나부터 이런 수많은 의문들에 휩싸여 이 매혹적인 4500년전의 건물에서 이러고 있으니까. 더욱 기가 막힌 건 한쪽 벽에 환풍구로 불리는 직선의 좁은 통로가 끝없이 뻗어 있는데, 이 통로의 용도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기술이 발달하여 카메라를 설치한 로봇을 집어넣어 탐사를 시작했는데 계속 진행하던 로봇이 다다른 건, 손잡이가 달린 화강암 블럭(문이라고 해야할지)이었다. 정말 끊임없이 현대의 기술과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대피라미드다.그동안 읽고 보고 접해왔던 대피라미드에 대한 지식과 생각과 의문들이 내 머리 속을 마구 헤집어 놓는 통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왕의 방은 숨막힐 정도로 정교하게 맞춰 놓은 화강암 벽체를 가지고 있어 그것 또한 감동적이었다. 전세계 어디에서도 역사가 시작되지 못한 시절 이런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니 고대 이집트인의 기술에는 그저 경이로운 마음이 들 뿐이다. 또 하나 의문스러운-이 건물은 의문 투성이니까 새삼스럽지도 않긴 한데-건, 바깥은 콧물이 흐를 정도로 쌀쌀하고 바람이 불면서 매우 건조했는데, 이 내부는 매우 따듯하고(반팔이 필요할 온도) 축축하게 습하다는 것이었다. 땅속도 아니고 대체 어디서 이런 열과 습기가 스며들어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한참을 마치 온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 습식 사우나처럼 느껴졌던 왕의 방을 나와 다시 대회랑을 통해 내려왔다. 허리를 굽혀야 하는 통로로 들어가기 전, 그 통로와 수직으로 만들어 놓은 또 하나의 통로가 보였다(철문이 달려 있는 부분). 이 통로를 따라 쭉 들어가면 왕비의 방(이라고 부르는)이 나오는데 거기는 왜 막아놨는지 모르겠지만. 왕비의 방이라는 것도 사실 맞지 않는 명칭인 것이, 대피라미드 앞의 작은 크기의 부속 피라미드들이 왕비들에게 바쳐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게 맞다면 대피라미드 내부에 왕의 매장실 말고 왕비의 방을 따로 만들 이유가 없다. 진실이야 어쨌든 여기에도 아래쪽은 정사각형, 위쪽은 평행사변형 모습을 한 홈이 깊게 파여 있고 역시 이것도 아무도 용도를 모르고 있다. 무엇인가를 끼워넣기 위한 건 틀림없는데 대체 무엇을 위해서 였을까. 이 위대한 건축물을 만든 고대 이집트인들이 아무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현대의 우리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면서 대피라미드의 미스테리들을 궁금해하고 추측하고 연구하는 것이니 이건 또 이것대로 효용이 있다고 해야할지.들어갔던 길을 되짚어 나와 밖으로 나왔다. 아래쪽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이렇게 되기 때문에 오픈 시간에 맞춰서 오는 게 답이다) 곳이 현대의 입구이고, 가운데에 보이는 것이 오리지널 입구이다. 그냥 한눈에 봐도 엄청난 크기의 들보 역할을 하는 2개의 돌이 맞대기 지붕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와 석재 한개의 두께만 해도 엄청나다. 단일 석재를 사용하는 건 오벨리스크도 마찬가지지만 그건 땅에다 바로 세우는 것이니 그렇다 치고, 이걸 건설할 당시에는 크레인이 없는 시절인데 저 높이까지 저 정도(수십톤, 아니 수백톤도 넘어 보이는) 무게의 석재를 대체 어떻게 들어 올렸을까. 고대 건축의 경이 그 자체.가이드가 잠시 피라미드의 둘레를 걸으며 마저 역사의 이런저런 설명(실상 내가 이미 책에서 거의 다 읽은)을 해준다. 한켠으로 들으며 대피라미드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나만의 관심으로 생각이 흘러갔는데, 여기에 쓰인 230만개의 석재는 1개가 평균 2.5톤으로 자동차 2대에 육박하는 무게인데 이걸 230만번 쌓아 올렸다는 얘기이니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겉면을 매끈하게 덮고 있었을 케이싱 스톤들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사라진 건, 후대를 거치며 이후의 지배자들이 건축물의 석재로 사용하기 위해 꾸준히 빼 간 결과이다. 옛 건축물이 후대 사람들의 채석장이 되버리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니 어쩔 수 없지만, 안타깝기 그지없다. 게다가 이 피라미드의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게끔 방위에 정렬되어 있는데, 그리니치 천문대보다도 그 정밀도가 높으니(대략15분의 1도 수준이다) 정말 어떻게 계측을 한 것인지. 나침반으로 측정하면 정북이 아닌 자북을 가리키게 되어 있으니 필연적으로 별을 이용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 보긴 하는데 그렇게 측정만 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한쪽변의 길이가 230미터에 이르는 구조물을 어떻게 이런 정밀도를 가지고 방위에 맞추었는지. 방위는 커녕 230미터 길이라면 그걸 정확한 직선으로 맞춰서 건설하다는 거 자체부터가 문제인데.대피라미드의 앞 장례신전이 있던 곳의 오른쪽 앞에 부속 피라미드들이 세 개 서 있다(원래는 4개였다고 함). 이 중의 하나는 쿠푸의 모후(헤테프헤레스 1세)에게, 나머지는 왕비들에게 바쳐진 것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건 아무도 모른다, 기록이 없기 때문. 피라미드들은 왼쪽이 가장 많이 허물어지고, 가운데는 중간, 오른쪽은 가장 원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내 흥미를 더욱 끈 것은 원래 장례신전이 있던 곳 바닥에 있는 검은색 현무암으로 된 포장석이었다. 지금도 엄청난 평탄도를 가지고 있는데 원래는 이 피라미드 앞 장례신전 전체(신전 폭만 해도 50미터에 이르렀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를 뒤덮고 있었을테니, 백색의 석회암으로 매끈하게 덮인 대피라미드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그 아래에는 이 검은색으로 잘 마름질된 현무암 바닥이 있는 장례신전의 모습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엄청난 아름다움을 뽐냈을 것이다.부속 피라미드들의 모습. 이 두 개가 쿠푸 왕비들의 피라미드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이어서 카프레의 피라미드. 현재 내부 관람은 안되는 상태이고 크기는 대피라미드에 버금가는데 약간 작다. 얼핏 보면 카프레의 피라미드가 더 커(높아) 보이는데 그 이유는 기자 고원이 완전히 평평하지 않고 높이차가 있기 때문으로, 카프레의 피라미드가 대피라미드보다 더 높은 지대 위에 서 있기에 그렇게 보이는 거다.크기도 그렇고 밑변과 높이도 거의 대피라미드(147m)에 비슷하다보니 흡사 쌍둥이나 친동생처럼 보이는 카프레의 피라미드(143m). 게다가 이쪽은 맨 위에 원래의 석회암 케이싱 스톤이 남아 있다. 멀리서 봐도 케이싱 스톤의 두께도 엄청나 보이는데 나 참…다른점은, 대피라미드는 밑변 둘레와 높이를 2파이에 맞추기 위해 사면경사가 51.5도에 맞춰져 있는 반면, 카프레의 피라미드는 사면경사가 53.1도로 수학의 코드가 인코딩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물론 대피라미드가 전혀 다른 차원의 미스테리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고 의도적인 수학의 비율들이 적용되어 있어서 그렇지, 카프레의 피라미드도 엄청난 건축물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단지 대피라미드에 “비해서” 덜 흥미로울 뿐이지.관광의 필수코스인 사진을 찍기 좋은 곳으로 다시 차를 타고 이동했다. 고원 위에 세 개의 피라미드가 보이는 곳에 도착해서 사진을 찍었다. 아 날씨만 흐리지 않고 맑았다면 참 좋았을 것을…멀리서 잡아 본 앞쪽에 보이는 카프레의 피라미드와 뒤쪽의 쿠푸의 대피라미드. 여기서 봐도 높이는 카프레가 더 높지만 기반의 지대가 높은 곳에 지어져서 그렇게 보이는 것으로, 대피라미드가 실제로는 더 크다.다시 차를 타고 이동해서 도착한 멘카우레의 피라미드. 이쪽은 높이가 66미터로 앞의 두 피라미드의 절반도 안된다. 높이가 이러면 체적은 더욱 상대가 안되는데, 대피라미드가 260만 세제곱미터이고 카프레는 221만, 멘카우레는 23만5천으로 10%도 안되는 체적으로 줄어든다. 이것 때문에 또 많은 추측과 낭설들이 제기 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오리온 자리(는 북반구 기준 겨울철의 별자리다)의 허리띠를 이루는 3개의 별을 지상에 표현해 놓은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피라미드의 크기는 허리띠 3개 별의 밝기(등성)를 묘사한 것이고, 이 3개의 별이 완벽하게 일직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세번째 가장 밝기가 어두운 별이 앞의 2개의 별을 잇는 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 직선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데 이 멘카우레의 피라미드도 쿠푸-카프레의 대각 꼭지점을 연결한 일직선에서 약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너무나 그럴싸해 보이는 추측이었다. 이건 별자리와 이 건축물의 연대와 비교해서 봐야하는데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하니(특히 가장 과격한 연대인 기원전 1만년전) 가려서 들어봐야 하긴 하지만 오리온자리를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로 보았다고 하니 여러모로 흥미로운 주장임에는 틀림없다.시간관계상(오후에 이집트 박물관을 가야했기에) 내부에 들어가보지는 않았는데 조금 후회가 된다. 뭐 어쨌든 멘카우레의 피라미드는 아래쪽의 케이싱 스톤이 남아 있고 붉은색 화강암으로 16단까지, 위쪽은 흰색 석회암으로 케이싱 스톤을 쌓았다고 하니 적백의 외장석을 가진 굉장히 유니크한 모습이었을 것 같다. 한가지 특이한 건, 외장석의 일부에는 아래쪽에 한 개나 두 개의 돌출된 부분이 있는데 이게 또 저 지구 반대편 페루의 쿠스코와 그 인근에서 본 구조물과 석재를 떠올리게 했다. 거기에도 동일한 것이 있어 학자들이 거대한 석재를 건설할 때 위로 들어올리기 위한 줄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를 보면 아래쪽은 없고 5단의 돌들부터 그런 흔적이 보이는 걸 보면 일정 높이까지는 손으로 쌓고 그 이상은 줄걸이를 이용했다는 건지…하여간 이것도 미스테리.멘카우레의 피라미드까지 보고는, 다시 기자 피라미드 컴플렉스의 앞부분으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지나가는 길에 잡아본 카프레의 피라미드 윗부분, 케이싱 스톤이 남아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억겁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풍화와 마모가 되기는 했지만, 저런 상태로라도 피라미드의 4면을 모두 포장석이 뒤덮고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을.이 기자 피라미드 컴플렉스는 남북으로 흐르는 나일강의 왼편(서쪽)에 조성되어 있다. 피라미드들이 서 있는 서쪽 고원에는 북동쪽부터 남서쪽 방향으로 차례로 쿠푸-카프레-멘카우레의 피라미드가 줄지어 서 있고, 카프레 피라미드의 정동 방향이 아닌 동남동 방향 쪽 앞에는 스핑크스와 밸리신전(카프레의 밸리신전이라고도 한다)이 건설되어 있다. 그냥 생각해보면 가장 큰 쿠푸의 피라미드와 연결되어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지만, 이 밸리신전에서 참배로가 연결된 건 카프레 피라미드 앞에 있는 카프레의 장례신전이다, 그것도 일직선으로 정렬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쿠푸의 피라미드 건설에는 피라미드 4면이 방위와 완벽하게 정렬되도록 병적인 집착을 보였으면서도 왜 스핑크스와 밸리 신전은 카프레 피라미드와 동쪽을 향해 일직선 정렬을 하지 않았는지 그것도 미스테리다.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가 되는 대로 피라미드를 지은 것이 아니라 스핑크스와 밸리신전을 포함한 이 건축물군 모두가 하나의 계획 아래 건설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 나만은 아닐 것이다.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상이라고 하면, 나는 2개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 대스핑크스다. 카프레의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스핑크스와 밸리신전의 일부.먼저 밸리신전부터 구경을 시작했다. 이걸 보자마자 든 생각은, 이건 저 멀리 쿠스코에 있는 사크사우아만의 거석 짜맞추기 방식과 닮아도 너무 닮았는데, 하는 거였다. 앉아 있는 관리인이 좋은 크기 대비가 되어 주는데 그 뒤에 있는 석재는 몇 톤은 나가는 무게인데다가 특히 코너쪽을 보면 쿠스코의 여러 건축물들처럼 직각 부분을 이루는 곳에 2개의 석재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1개의 석재를 직각으로 가공하여 코너 부분에 쌓은 곳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 왜 그렇게 번거로운 작업을 해야만 했을까. 또 하나, 이 거석 문화는 아치를 쓰지 않았는데, 충분히 석재의 크기가 크고 단단하기 때문에 대들보를 가로로 얹어도 구조적으로 문제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피라미드의 대회랑에서도 아치가 아니라 코블 아치 형태로 천장이 되어 있는 것도, 수십만톤의 하중-물론 분산이 되었겠지만-을 버틸 수 있는 아치는 당시의 기술, 이라기보다 당시에 사용할 수 있는 석재로는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1개 석재의 코너를 이루는 부분을 직각 가공한 것 뿐 아니라, 각 단의 석재의 높이도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석재를 모두 직사각형으로 가공하고 쌓으면 편했을텐데, 굳이 코너에 1개의 석재를 쓴 것이나 각 단의 높이가 달라 1개의 석재가 직육면체가 아닌 다면체가 되도록 가공해서 쌓는 것도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텐데, 지금은 인류가 잃어버린 기술이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지진 등에 대비해 구조적인 안정성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였든, 이게 이 건축법의 양식이었든, 어떤 이유였을지 너무 궁금한데…물어봐도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70억 인구중에 한 명도 없다는 것도 안타깝네.첫번째 입구를 통과하면 나오는 공간에는 두번째 공간으로 가는 입구가 있었는데, 여기에도 다각형 석재 짜맞추기 공법이 사용되었다. 화강암과 석회암을 이용해서 지은 이 밸리 신전은 기원전 26세기 카프레가 지었고(그렇다고 추정한다), 이집트에 밸리 신전 말고 유이하게 이것과 비슷한 건축물은 저 멀리 아비도스의 세티 1세 신전 뒤에 있는 오시레이온이 있다. 오시레이온이 고고학자들의 주장대로 기원전 13세기에 지어졌다고 하면, 1300년의 시차를 두고 동일한 건축양식과 건축공학 기술이 사용된 건물이 건설된 것인데, 이 2개의 건축물을 제외하고 이런 양식은 고대 이집트에 단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다. 특징은 거석을 사용했고, 매우 정교하면서도 그 어떤 신전보다 보존 상태가 좋으며, 화강암을 주 재료로 사용했다는 것이고 여기에서 비롯되는 의문점은,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대 이집트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2500년 정도의 기간 동안 왜 딱 2개 건물에만 이런 건축공학과 기술이 사용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도 13세기의 시차를 두고 말이다. 밸리 신전과 오시레이온이 다른 건축물에 비해 조잡한 기술을 사용했다면-물론 그랬다면 현대에까지 보존되지도 못했겠지만-그나마 이해가 가는데, 이 두 건물은 대피라미드급의 앞선 수준의 건축공학과 기술이 사용된 건물이다. 그러니 카프레의 피라미드, 밸리 신전, 스핑크스를 카프레가 지은 것이 맞다면 오시레이온도 동일한 건설자가 동시대에 지은 것 아닐까?라는 내 생각과 의문점을 옆에서 열심히 설명을 해주고 있던 가이드에게 말해보니 비슷한 두 신전이 큰 시차를 두고 다른 장소에 지어진 건 이상한 게 맞지만 4왕조의 중심지는 멤피스로 멤피스와 주변 말고는 건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비도스의 오시레이온을 4왕조가 건축했다고는 간주하지 않는다고 한다. 듣고 보니 그 말도 맞긴 하네.밸리 신전은 과거에 나일강에서 배를 타고 기자까지 온 다음 인공 운하로 파놓은 물길을 따라 도착하면 바로 밸리신전으로 입장할 수 있는 형태였다고 한다. 여기서 참배를 하고 참배로를 따라 올라가면 카프레 피라미드 앞의 카프레의 장례신전에 도달하는 구성. 그게 어디까지 맞는 설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밸리 신전의 위 사진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더욱 확신이 생긴 건, 동시대의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밸리 신전과 오시레이온은 동일한 엔지니어링을 적용해 지은 건축물이라는 사실이었다. 거대한 기둥과 그 위에 가로놓여진 거대한 석재를 사용한 대들보. 바로 오시레이온에서 본 그것이었다. 페루를 여행하며 쿠스코에서 본 여러 거석 구조물에도 엄청난 감동과 강렬히 나를 끌어들이는(대체 이걸 어떻게, 왜 지었지 하는 의문에서 기인한) 매력에 푹 빠졌었는데, 이집트의 오시레이온과 밸리 신전은 놀라움과 감동이 두배였다, 현재 주류 고고학계의 말을 믿는다면 두 나라의 건물들 사이에는 최소한 2천년이라는 세월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집트가 선배.이번에는 스핑크스 차례. 앞서 말했듯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2개의 조각상 중 훨씬 더 오래된 대스핑크스는 또 엄청난 미스테리들을 간직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동쪽은 생명과 탄생, 부활을, 서쪽은 죽음, 사후세계를 의미했기 때문에 피라미드들은 나일강의 서쪽에 있는데(룩소르 왕들의 계곡에 있는 파라오의 무덤들이 모두 나일강 서쪽에 위치해 있는 것도 같은 이치), 거기에 같이 있는 스핑크스는 영원의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사후 파라오는 사후세계를 여행하고 신이 되는 것이 핵심 제의였으니, 스핑크스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고대 조각상중 가장 거대한 조각상은 여러가지 이유로 고고학자들의 골치를 썩이는 존재인데, 스핑크스의 앞 발 사이에 있는 것은 그 유명한 18왕조 투트모세 4세(재위 1401~1388)가 새긴 ‘꿈의 비석’으로 원래 장자가 아니었던 그가 잠을 자다가 꿈에서 스핑크스가 나타나 나를 꺼내주면 왕위를 주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잠에서 깬 다음 모래속에 파묻혀 있던 스핑크스 주위의 모래를 치우고 다시 전체를 드러내놓고 나자 파라오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일설로는 투트모세 4세가 일종의 쿠데타 내지 왕자의 난을 일으켜 파라오가 된 뒤 자신의 왕위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스핑크스 이야기를 지어낸 것일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 정치 프로파간다를 위한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나의 흥미를 더욱 끄는 것은 스핑크스가 건설된 기원전 2500년에서 1100여년이 지나 투트모세 4세가 꿈을 꾼 당시에 스핑크스는 ‘목부분까지 모래에 파묻혀’ 있었다는 것이다. 길이가 약 73미터에 이르는 1개의 석재를 통째로 깎아 만든 조각상을 가만히 놔두면 모래에 파묻혀 버리는 곳에 지은 이유가 무언가 말이 안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건 과거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했던 19세기에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계속 모래를 쓸어내줘야 한다. 이런 엄청난 조각상을 굳이 이런 곳에 왜 건설을 했지…?가 내 의문의 근본이다.이것만이 아니고 이집트에 남은 그 어떤 스핑크스와도 다른 특징은 머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작다는 것이다. 몸통과 머리의 비율이 7~8:1인 보통 스핑스크와 달리 대스핑크스는 20:1의 비율인데 이것 때문에 지금은 네메스를 쓰고 있는 파라오의 머리이지만 원래는 사자나, 호루스의 머리나 다른 모습이었던 것을 후대에 다시 파라오의 머리 모양으로 재조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게 만든다. 그래서 과격론자들은 스핑크스가 훨씬 오래전, 북아프리카가 사막화되기 이전 초목이 흐드러진 기름진 땅이었을 때 스핑크스를 지었다가 사막화가 된 다음 파라오의 머리만 재조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런 설명은 가만히 놔두면 모래에 파묻히는 스핑크스의 건축 위치와, 몸통에 나 있는 엄청난 양의 강우에 의한 침식흔적-고대 이집트 시대에 북아프리카는 이미 사막이었다-두가지를 모두 설명해 줄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이 정도 기술력을 가진 (우리가 알고 있는)고대 이집트 이전의 이집트 인들이 이 스핑크스 말고 아무런 석조건축을 남기지 않은 것이 또 설명이 되지 않는다. 보다 합리적으로 보면 이 거대한 암석덩어리가 침식과 풍화에 의해 사자의 모습처럼 변했고, 그걸 고대 이집트인들이 다듬어서 스핑크스로 만든 건 아닐까, 하는 것일텐데 고대 이집트인들이 어느 정도로 손을 봤는지 알 수 없으니 엄청난 강우에 의한 몸통의 침식 흔적은 명확히 설명할 길은 없다.가이드의 일반적인 설명을 들으면서 잡아 본 스핑크스의 뒤태. 꼬리까지 거대하게 몸통에 말려 있고, 등을 제외한 아래쪽에는 벽돌로 덮여 있어 스핑크스도 피라미드처럼 케이싱 스톤으로 덮여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스핑크스의 표면에서 염료의 흔적이 나왔다고 하니 아마 사자의 털 색깔인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고 파라오의 모습을 한 얼굴에서는 여러가지 색의 염료 흔적이 있다니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었을 것이다.스핑크스 옆에 주욱 펼쳐져 있는 밸리 신전부터 시작되는 참배로. 밸리신전에서 이 참배로를 쭉 따라가면, (일직선으로 정렬되어 있지 않은) 카프레의 장제신전과 연결이 된다. 과거에는 나일강으로부터 운하를 건설하여 밸리 신전과 연결되어 있고 현대의 건물들도 없었을테니, 해가 뜰 아침무렵 여기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면 저 뒤에 나일강이 도도히 흐르고, 4왕조 파라오들의 피라미드 앞에 웅크리고 있는 스핑크스는 영원의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을텐데. 하지만 현대의 우리도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당시의 모습을 머리 속에는 복원해 볼 수 있다, 이 자리에 서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스핑크스를 끝으로 이날 가이드와의 동행은 끝이 났고, 기사와 가이드는 약속대로 나를 이집트 박물관 앞에 데려다줬다. 가는 길에 당시(2023년 12월) 이집트 대통령이 쿠푸를 닮았다는 우스개 소리를 들었는데 과연 여기저기 광고판에 붙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나도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현재 남아 있는 쿠푸의 상은 아주 작은 석상 하나가 전부인데,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왠지 정말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이집트 박물관 앞에서 내리긴 했는데, 점심때가 가까워져 배가 고팠다(호텔의 조식이 너무 심플하기도 했고). 그래서 일단 뭐를 조금 먹을 셈으로 구글맵을 켜고 레스토랑을 찾아보니, 박물관 쪽에는 식당이 없고 큰 길을 건너야 하는데, 이게 또 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한국도착가계산방법 엄청났다. 왜냐하면 신호등이 없고 왕복 8차선 정도 되는 도로에 차들이 그야말로 끊임없이 오고 갔기 때문이다. 길을 건널 엄두도 못내고 있는데 현지인들은 차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길을 건너고 있었다. 그 꼴을 보면서 망설이던 나를 보자 친절한 현지인 하나가 자기를 따라오라며 먼저 길을 나서서 나도 그 뒤를 따라 어찌저찌 건너긴 했는데, 정말 수도가 이 모양이니 이집트는 갈 길이 멀고도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한 번 해보니 또 익숙해져서 돌아오는 길에는 나도 현지인처럼 무리없이 길을 건너긴 했지만). 박물관에서 1분이라도 더 구경해야 했기 때문에 내 결정은 패스트푸드인 햄버거였는데, 메뉴 리스트를 보니 베이컨이 들어간 햄버거가 있어 미국에서 나의 최애였던 웬디스의 Baconator를 추억도 할 겸 베이컨이 들어간 더블버거와 치즈프라이 세트를 시켜 먹었다. 물론 오리지널인 웬디스의 베이커네이터에 비할바는 아니었지만, 변변한 신호등도 없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먹는 맛으로는 충분히 만족했다, 게다가 나는 배가 많이 고팠으니까.그리고 다시 돌아온 이집트 박물관. 이 때 원래는 GEM이 12월에 개관할 예정이라고 해서 이 날 피라미드와 GEM을 구경할 생각이었지만 계속 미루고 미뤄져서 지난달에야 열었다는 게 새삼 화가 나네. 하여튼 내가 여행할 당시에는 미개관 상태였기 때문에 전통의 가장 중요한 고대 이집트 박물관이 이 날 오후의 목표였다, 실제로는 열두시 조금 전에 도착했지만. 여기에는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황금마스크 등 고대 이집트의 하이라이트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폐관시간인 다섯시까지 열심히 관람해야만 했다. 나 정도의 매니아는 하루를 투자해도 모자랄 수 있겠지만 시간을 이 날 반나절 밖에 쓸 수 없어 미리 어떤 룸에서 시간을 많이 보낼지 계획까지 모두 짜놓은 상태였다.연대순으로 고대 이집트의 찬란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이 박물관은, 사실 오래되어(1902년 건설) 그 후로 유물들이 계속 더해지기는 했지만 레이아웃이 20세기초의 것이 기본 베이스다 보니 동선도 그렇고 설명 레이블도 그렇고 오래되고 불편한 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문제고, 여기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의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니까 이 정도의 불편은 감수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여기서 시간을 더 오래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이 거대한 화강암으로 조각된 상은 람세스 2세의 것이다. 거의 완벽한 보존 상태를 보여주는데 이럴 수 있었던 건 1901년에 발굴된 것이기 때문이다.이 기념비적인 좌상은 고대 이집트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2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카세켐위의 것이다. 거의 재위는 기원전 2700년경이니 4천7백년이 지난 유물이라 정말 까마득하다. 이 녹색 편암에 앉아 있는 카세켐위는 워낙 오래된 파라오라 기록이 거의 없지만, 그의 아들이 바로 위대한 파라오였던 3왕조의 첫번째 파라오이자 세계 최초의 피라미드를 건설한 조세르다.5왕조 시기(기원전 25~24세기)의 봉헌물을 바치는 테이블. 설명 레이블이 1950년대에 만들어진 듯 부실해서 별로 정보가 없었는데, 석회암으로 제단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흰색 설화석고로 원형 접시 역할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봉헌물을 올려놨을 것 같다. 정말 오랫동안 사용한 듯, 표면이 매우 반질반질했다.그리고 내 눈 앞에 나타난, ‘그 모든 것의 시작’인 3왕조의 첫번째 파라오 조세르(Djoser)의 석상. 고대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1:1 비율 석상이 바로 이 조세르의 석회암 좌상이다. 그는 여러가지로 최초의 타이틀을 여러가지 가지고 있는데, 고왕국의 첫번째 파라오(3왕조를 고왕국의 시초라 보는 시각에서)이자 사각형 무덤인 마스타바를 벗어나 첫번째로 피라미드를 건설한 파라오다. 시나이 반도와 나일강 상류(남쪽)로 활발한 군사활동을 전개하여 이집트의 국경선을 확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건축에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건축면에서는 명재상이자 신관이자 건축공학자인 임호텝의 활약이 있어 가능한 것이기도 했지만. 굳게 다문 입이 그의 강인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 같은 감동이 밀려왔는데,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이 믿는 것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강한 파라오에 아주 잘 어울리는 석상이었다. 원래 이 석상은 사카라에 있는 그의 피라미드 북쪽의 별실 내부에 들어 있었다. 그 피라미드 앞에 있었으니 조세르의 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석상의 좌대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계단식 피라미드가 조세르의 것임을 특정할 수 있다. 좌대의 아래쪽 정면에 신성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가장 오른쪽에서부터 두 글자가 조세르의 즉위명(Djoser-it)이다.6왕조의 왕자였던 Thaut Khuzam의 비석 일부에 새겨져 있는 부조. 의자에 앉아 있는 왕자 앞의 케이블에는 여러가지 물품이 잔뜩 올려져 있는데, 아마도 내세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는 뜻이었겠지.이 귀여운 사자 2마리가 조각되어 있는 알라바스터 제단/테이블은 조세르의 피라미드 건물 컴플렉스에서 발견된 것이다. 사자 머리와 발톱은 보통 권력과 보호를 상징하니 파라오의 물건에 쓰기도 제격이다. 조세르의 계단 피라미드가 있는 사카라 지역은 고왕국 시절의 수도인 멤피스 근처이기도 하고, 여기에도 아무런 문자가 새겨져 있지 않으니 고왕국의 것이 확실한 듯.약간은 검푸른 빛이 감도는 섬록암으로 조각한 이 멋진 조각상은 기자 피라미드의 2등이자 두번째 피라미드를 지은 카프레의 석상으로, 기자의 밸리신전 아래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섬록암의 산지는 저 멀리 아부심벨 근처 채석장이므로 이미 그 당시에 엄청나게 광활한 영역까지 4왕조의 힘이 미쳤다는 걸 알 수 있다. 파라오의 얼굴은 물론 몸통과 팔다리의 묘사도 굉장히 사실적이어서, 정형화된 회화나 부조에 비해 조각은 상당한 자유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몸통이 조금 이상화되긴 했지만 매끈한 팔다리의 근육과 발가락은 굉장히 리얼리즘이 살아있는 표현이었다. 그의 오른쪽 발 옆에 새겨져 있는 카르투슈가 바로 그의 즉위명 카르투슈다. 카프레는 대피라미드의 주인공인 쿠푸의 2대 후 파라오인데 이 정도의 조각상을 남겼지만 정작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남긴 쿠푸는 아주 작은 조각상 하나만이 남아 있다. 이집트의 땅을 파헤치고 다니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건축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피라미드를 건설한 파라오의 조각상이 변변한 게 없다는 건 아쉬울 수 밖에 없다.얼핏 얕아 보이는 이 부조는 5왕조의 두번째 파라오인 사후레의 부조다. 상하이집트의 왕관을 쓰고 있는 파라오의 머리 앞에 있는 것이 사후레의 즉위명 카르투슈. 4왕조의 뒤를 이은 만큼 사후레도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는데 지금은 절반쯤 무너져 내린 상태다. 여러 5왕조 파라오들의 피라미드들은 모두 같은 운명을 맞게 되는데 어떻게 나중에 지은 것이 먼저 지은 4왕조의 피라미드들보다 공학 수준이 떨어진 걸까?하는 것도 의문점. 물론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고대 이집트의 국력이 떨어졌을 수도 있지만, 하여간 미스테리다. 그것과는 별개로 사후레는 활발한 교역을 장려했던 것으로 보이며 내외치 모두에서 성공을 거둔 파라오였던 것 같다.당연히 고대 이집트에서도 그때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여러가지 토기가 존재했는데, 여기에 있는 건 5왕조 시기인 기원전 25~24세기 맥주를 제조하는 여인을 묘사한 토기다. 맥주는 고대 이집트의 대중 음료이자 술로,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에 관해 기록된 파피루스에서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물품으로 기록되었을만큼 유서가 깊다. 그냥 배급한 것이 아니라 결근 사유로 숙취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위대한 피라미드의 건설자들은 퇴근후 술 한 잔 마음대로 걸칠 수 있는 자유민으로, 통념상 노예들이 건설했을 것으로-유럽 최초의 역사서를 남긴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그렇게 추정했다-생각했던 것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나타내주는 기록도 존재한다.이 경사암으로 매끈하게 만들어진 3개의 Triad석상은 기자 고원 3번째 피라미드의 주인인 멘카우레의 것이다. 멘카우레 피라미드 앞에서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가운데에는 멘카우레가 그의 오른쪽에는 사랑의 여신 하토르가 서 있다. 카프레와 멘카우레의 석상이 이렇게 훌륭한 작품으로 남아 있는 걸 보면 역시 어딘가에 쿠푸의 것도 잠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건축이고 조각이고 뭐고간에 이 4왕조의 것이 가장 뛰어난데, 아부심벨이나 룩소르에서 본 것들은 규모가 엄청난 것은 맞지만 너무 정형화 되어 있는데 비해 카프레나 멘카우레의 조각상은 대단한 리얼리티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아스완, 아부심벨을 거쳐 룩소르까지 여러 곳에서 봤던 여신의 젖을 물고 있는 파라오의 부조. 여기에 있는 파라오는 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우나스로, 이 장면은 5왕조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신의 젖을 받아 먹고 있는 모습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왕권의 정당성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였다고.파라오 사후레 신전에 있던 부조로 여러가지 봉헌물을 바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가운데 줄에 여자-남자 순서로 여려가지 봉헌물을 손에 들고 있는데 의도하 것인지 남자는 약간 배가 나온 일반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재미있네.5왕조의 첫번째 파라오인 우세르카프의 두상. 5왕조를 연 우세르카프는 사카라 근교의 아부시르(Abusir)에 처음으로 건물을 짓기 시작했고, 5왕조부터 광범위하게 태양신 라에 대한 숭배가 본격화된 것과 궤를 같이 하듯 태양의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하이집트의 왕관인 붉은 왕관(데슈레트)을 착용하고 있는데 이건 Neith 여신의 상징이기도 해서 이 두상의 주인이 누군지 약간 혼동이 있었지만, 두상의 윗입술 위에 수염이 묘사되어 있어 우세르카프로 특정했다고 한다.여러 부조 사이에는 이런 흥미로운 것도 있었다. 5왕조 시기 만든 이 부조에는 3개의 작은 보트에 남자들이 타 있고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이건 수상 스포츠의 하나였다고 한다. 아마 팀을 짜서 상대방을 먼저 배에서 떨어뜨리는 게임이었던 것 같은데, 같이 발굴된 상형문자에 “뒤에서 공격해”, “다리를 부러뜨려(이건 스포츠치고 너무 과격한데)”따위의 대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사카라에서 발굴된 5왕조 시기의 부조패널. 가운데 줄에는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아래줄에는 여성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다. 악사와 무희가 있었다는 건 그 사회에 여유가 있었다는 걸 증명한다고 보면 되는데, 먹고 사는 데 정신이 없으면 이런 사이드 액티비티는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야 지금 남아 있는 건축물만 봐도 엄청난 국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증명되긴 하지만.이 라이프 사이즈의 채색된 석상은 Rahotep과 그의 아내 Nofret의 무덤에서 발굴되었다. 라호텝은 4왕조 초대 파라오이자 굴절 피라미드와 붉은 피라미드를 건설한 파라오인 스네프루의 아들이며, 대피라미드의 주인인 쿠푸와 형제지간이다. 이런걸 어떻게 알았냐고? 좌상의 의자 부분에 신성문자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알았다고. 이 부부는 모두 젊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묘사해 놨을 것이고, 와이프쪽은 얼굴만 조금 후덕하게 보이는 데 얼굴살이 많았던지, 아니면 아직 어린 시절 젖살이 안 빠졌을 때를 묘사한 것 같기도 하다.5왕조 시기 대신관이었던 Kaaper의 목상. 파라오나 왕자를 비롯한 왕가의 사람들은 조각상이나 부조에서 모두 매끈하게 다듬어진 몸매를 자랑하는데 이 대신관의 목상은 완전히 현실 그 자체이다. 시원하게 벗겨진 머리, 후덕한 얼굴, 접혀 있는 턱, 튀어나온 복부까지 적나라한 40~50대 아저씨를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목각해 놓았다. 목상임에도 굉장한 생동감이 느껴졌던 건 이 상에 눈이 실제처럼 붙어있기 때문인데, 수정과 방해석, 구리를 이용해서 눈을 박아 넣었다고 한다. 저 눈 하나로 목상에 완벽한 생동감이 불어넣어진 것이 신기했다.이 심플하고도 잘 보존된 석상은 기원전 21세기 중왕국 11왕조 멘투호테프 2세의 것이다. 중간기를 거치고 마침내 다시 상하이집트를 통일한 파라오로, 초대 파라오로 여겨지는 전설의 파라오 나르메르 이후 두번째로 고대 이집트 왕국을 통일한 인물이다. 특이한 건 그의 피부가 검은색으로 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를 근거로 들어 그의 가계가 누비아 지방(흑인들이 사는)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 상이 하나가 아니라 다른 상에서도 그는 검은색 피부로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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